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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실 울산의대 명예교수의 별명은 ‘한글과 사랑에 빠진 의사’이다.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의사였던 그녀는 출판사 허원미디어를 설립하고, 훈민정음의 창제 역사와 원리를 안내하는 책 <한글, 자연의 모든 소리를 담는 글자>를 공저했으며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4개 국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하였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 한글에 대한 인문학 강연을 펼치고, 유튜브 채널을 통해 교양 콘텐츠 ‘우리가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있는 유은실 교수. 의사이자 출판사 대표라는, 얼핏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가지의 삶을 지난 15년 간 열정적으로 일구어 왔던 그녀를 만나 참사람의 가치에 대해 들어보았다.

 

 

병리학 의사, 한글의 원리에 매료되다

인왕산의 동쪽과 경복궁 사이, 조선시대에는 ‘준수방’이라 불렸던 오늘 날 통인동과 옥인동 일대는 겨레의 성군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해 이름 지은 서촌의 ‘세종마을’에는, 허원미디어가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는 한옥 ‘북성재’가 전통의 조형미를 뽐내고 있다.

 

“일부러 온 것은 아니었어요. 우연히 기회가 닿아 옮기게 되었는데 세종마을이더군요. 운명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소녀처럼 해맑게 웃는 유은실 교수의 별명은 ‘한글과 사랑에 빠진 의사’다. 1982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89년부터 서울아산병원에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의사로 근무했던 그녀는 대체 어떤 계기로 한글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대학 시절부터 잘 알고 지냈던 김명호 한의사 선생님이 계기가 되었죠. 그 분이 한의학의 원리를 설파하는 책을 준비 중이셨거든요. 한의학과 한식, 한글이 어떤 이치에서 일맥상통하는지 설명하고, 더 나아가 국내 교육의 대안까지 함께 모색하는 내용이었죠. <자연, 사람 그리고 한의학>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고, 그 중 한글과 관련된 부분이 저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일단 흥미가 생긴 분야는 깊이 파고드는 것이 그녀의 기질이었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한글의 창제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훈민정음부터 시작해야했다.

 

“훈민정음은 오늘 날로 치면 매우 훌륭한 과학 논문 한 편과도 같습니다. 이 얇은 책 안에 이토록 치밀한 논리와 철학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어요.”

 

그렇게 그녀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한글 연구가이자 그 우수성을 안내하는 전도사로서 새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출판사 설립으로 이어진 한글사랑

‘무릇 사람의 말소리는 오행에 근본을 두고 있다. 오행에 바탕을 둔 말소리를 네 계절에 어울려 봐도 어그러지지 않고, 오음에 맞추어 보아도 어긋나지 않는다.’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의 첫 문장에서는 한글이 음양오행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한글을 배울 때에도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글자모양과 소리를 익히면 훨씬 재미있고 쉽게 습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양오행의 개념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개념이었다. 시중의 교재 또한 대부분이 발성기관을 본떴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 근원은 안내하지 않는 경향이 대부분이었다. 유은실 교수는 한글의 창제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한글과 음양오행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는 책이 필요했어요. 김명호 한의사 선생님에게 집필을 권유했습니다. 원고는 완성되었지만,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는 것이 문제였어요.”

 

팔릴 만한 책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으나 모두 외면당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출판계 역시 엄혹한 경제원리가 작용하는 시장이었다. 김명호 한의사 선생님의 지인이었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잘 알려진 유홍준 교수의 도움으로 출판사를 찾을 수 있었고 그렇게 나온 책이 바로 학고재의 <한글을 만든 원리 : 누구나 아는 한글 아무나 모르는 음양오행>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책을 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죠. 좋은 원고를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바로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어요.”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도서전 경험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유은실 교수는 삼국유사를 독일어로 처음 번역해 출간했던 레겐스부르크 대학의 베커스 김 교수가 도서전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글 제자원리에 관한 강연 및 한글로 이름쓰기 코스를 진행하는 데 함께 참여했다.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외국인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배워서 자기 이름을 직접 써보는 것이 한 코스였는데 한글 제자원리를 설명해 주니 짧은 시간 안에 모두가 훌륭하게 해 내더군요. 이 사람들을 위해 한글의 원리를 안내하는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2005년, 출판사 ‘허원 미디어’를 설립하게 된다. 서울아산병원 의사이자, 한글 연구가를 거쳐, 출판인이라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추가한 것이다.

 

한글, 자연의 소리를 담는 글자

학고재의 <한글을 만든 원리 : 누구나 아는 한글 아무나 모르는 음양오행>은 어려운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가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직접 설립한 허원 미디어가 있었으므로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고민을 담아 새롭게 기획한 <한글, 자연의 모든 소리를 담는 글자>는 한글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픈 여러 전문가가 협업한 뜻 깊은 결과물이다. 유은실 교수와 김명호 한의사, 워싱턴대 한국학과 김수희 교수 및 에밀리 커티스 교수 등이 공저했다.

 

“훈민정음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제자원리를 문답식으로 정리한 일종의 해설서입니다. 한글의 우수함을 최대한 다양한 언어로 전하고 싶었어요. 책의 왼쪽 페이지는 한국어로, 오른쪽 페이지는 외국어로 번역 표기했습니다.”

 

유은실 교수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했다. 일본 대사관에 근무하던 지인을 통해 일본어판을 만들고, 육군3사관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을 통해 중국어판을 냈다. 영어와 프랑스어까지 <한글, 자연의 소리를 담는 글자>는 4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독일어, 스페인어, 아랍어 번역도 준비 중이다.

 

한글 가르치는 의사

유은실 교수와 그녀의 모친은 여러모로 닮은 부분이 많았다. 어머니 또한 의사의 길을 걸어왔고, 본업 외의 외도에도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다. 모전여전이라 했던가. 어머니는 교학의 뜻을 품고 강서학원을 설립했고, 그렇게 안산의 강서고등학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유은실 교수에게는 청소년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안내할 수 있는 좋은 창구였다. 연 1회 직접 한글 특강을 진행하는 한편, 그녀의 제안으로 강서고 학생들을 위한 훈민정음 해례본 교재가 마련되었다. 학생들은 재학 기간 중 최소 한 번은 해례본을 완독하고, 한글의 가치를 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교사들의 연구 모임도 적극 독려했다. 그녀의 주도로 강서고등학교 국어교사 5인이 협업한 끝에 올바른 한글 사용을 안내하는 <함께 떠나는 한글 여행>이 출간되었다. 교사와 학생 간의 한글 이해활동, 인터넷 등 각종 매체에서 한글이 활용되는 방식과 학생들의 체험기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강서고는 매년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는 등 한글사랑 실천이 유난하다. 그녀는 또한 의대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선택과목의 하나로 우리가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라는 선택수업을 올해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어떤 형태로든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전하고 싶어 한다.

 

“한글의 우수함을 국민 모두가 알고 자랑스러워했으면 해요. 한글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모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잡한 소리를 표기하기가 좋아요. 그런데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모음의 개수가 가장 많은 문자이지요. 그래서 한글은 소리를 제대로 적을 수 있는 현존하는 최고의 발음기호입니다. 소위 자음문자로 분류되는 아랍 문자의 경우에는 모음이 3개뿐이어서 다양한 발음을 표기하는데 한계가 있어요.”

 

유은실 교수의 다음 목표는 한글에 입문하는 사람들 모두가 훈민정음이 제시하는 원리에 따라 문자를 배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어 어학당에서 한글을 가르칠 때 가,나,다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훈민정음에서는 ㆍ, ㅡ, l 기본 모음 3개에서 입을 벌리거나 입을 오므려서 내는 모음 ㅗ, ㅏ, ㅜ, ㅓ 4개와 이들 모음에 다시 l가 합해진 모음 등 무수히 새로운 모음이 파생됨을 설명하고 있어요. 이렇게 훈민정음에서 설명해 놓은 대로 배우면 쉽고, 재미있고, 무엇보다 훈민정음의 존재를 외국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죠. 한글 교재의 제1장을 그렇게 바꾸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한글에 대한 애정이 유은실 교수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관심과 계기도 스스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는지에 따라 거대한 변화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그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린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성장을 추구하는 유은실 교수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참사람이다.

한글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살피고 있으면 ‘청춘은 인생의 어떤 시절이 아닌 마음의 상태’라고 이야기 했던 사무엘 울만의 시가 떠오른다. 나이와 상관없이 경이로운 것에 대한 매혹과 삶 속의 환희를 간직한다면 그야말로 바로 청춘이라고 이야기했던 시 말이다. 호기심을 결코 잃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유은실 대표의 이야기는 ‘은퇴와 죽음’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2부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