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에세이 마흔 아홉 번째 편지
나도 그들처럼

글 : 유승용(참사람 독자)

‘이제 나도 어엿한 성인이니 부모님께서 짊어지신 짐을 어떻게든 나눠야 한다’는 치기어린 고집은 유학을 앞둔 스물셋 청년의 일상을 바쁘고, 또 치열하게 만들었다. 

오후 시간부터 시작된 아르바이트는 늘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다음날 등교를 위해서는 수면시간의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런 나에게 있어 기동력 발휘를 위한 오토바이는 꼭 필요했다. 어렵사리 장만한 오토바이는 멋을 내기 위함도, 취미생활을 즐기기 위함도 아닌 그야말로 생존형 교통수단이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자정을 넘긴 시각, 고요한 도로에 나 홀로였던 귀갓길. 젖은 솜처럼 지친 몸은 거의 엎드려 누운 자세가 되어 몽롱한 상태로 엑셀레이터 손잡이를 당기고 있었다. 몸살기운으로 인해 오후 내내 골골대던 내게 주유소 소장님은 “컨디션도 안 좋은데 무리하게 운전하면 위험하니, 주유소에서 자고 가라.”고 권했던 터였다. 잦은 외박으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린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불량아들이었기에, 소장님의 배려에 ‘꾸벅’ 감사인사만 드리고 서둘러 귀갓길에 올랐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지친 몸을 자극하며 과하게 속도를 내던 길, 외롭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한 도로에 멀찌감치 승용차 불빛이 보였다. 오른쪽 차선에서 줄곧 서행하던 차량… 난 그 왼편 도로로 달리고 있었는데 2차로에 있던 차량이 1차로의 나와 가까워질 찰나, 갑자기 속력을 내며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량의 불법유턴과 동시에 나 또한 살기 위해 왼쪽으로 급히 핸들을 꺾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듯 했다. 도로 위의 정적을 깨뜨린 강력한 충돌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시간은 우리가 현실에서 체감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지는 듯하다. 오토바이가 차량의 옆구리에 온전히 꽂히면서 내 몸이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던 그 순간,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나온 삶의 궤적이 마치 영화필름처럼 숨 가쁘게 돌아갔다. 특히, 기억 속에 꼭꼭 감춰두었던 과오들…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아픈 기억들,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하나둘 튀어나와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을 느꼈을 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왜 후회는 항상 늦으며, 모든 게 끝날 즈음에야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걸까. 
‘미안해요…’, ‘한번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앞으로 내가 더 잘 할 게요.’ 

두려웠다. 억울하고, 분했다. 이대로 멈추기엔 짧은 내 생이,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차가운 도로에 내동댕이쳐지던 그 순간… ‘답답하다’는 핑계로 평소 헬멧 착용을 소홀히 했던 안전 불감증을 책망하며, 무방비상태인 머리를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가여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그것뿐이었다. 고통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폭포수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 주위가 몹시 아렸다. ‘미안해요… 모두에게…’

그때, 기적처럼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학생 정신 들어요?” “학생! 괜찮아요?” 119였다. 순간, 반가움과 고마움에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온 힘을 짜내어 고갤 끄덕였다. 물감처럼 번져가는 시야에 휴지조각 같아 보이는 오토바이 형체가 흐릿하게 들어왔다. 끈적끈적 바닥에 흥건한 이것이 유출된 기름인지, 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 모든 장면이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모습처럼 선명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들것에 누워 바라본 밤하늘의 선명한 별빛들,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내내 느껴지던 구급대원분의 따뜻한 손길과 더없이 다정한 음성…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게 아니라면, 이는 분명 천국으로 가는 행렬이리라.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퉁퉁 부은 두 눈이 달라붙어 잘 떠지지 않았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애써 미소 짓고 계신 부모님을 마주하니, 안도감과 반가움이 뒤섞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린아이처럼 부모님의 품에서 그렇게 한참을 흐느꼈다.

천운이었다. 치명적인 사고였음에도 후유증 없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았다. 내게는 마치 구원처럼,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온 119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했다. 다시 살라는 기회를 주셨으니 나도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리라. 내 이웃들의 참된 이가 되고 말리라. 유학을 준비하던 평범한 청년이 불현듯 소방관이 되고자 한 까닭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119 구급대원분의 손길, 그 따뜻한 체온의 여운에 힘입어 새로운 도전은 비로소 결실을 맺었고, 오늘 난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11년째 소방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두 번째 삶엔 그 어떤 후회도 남지 않도록, 참다운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반추하면서 말이다. 

이토록 근사한 삶을 살게 해 주신 그날의 참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고마워요, 119!” 아울러, 오늘도 전국의 재난현장에서 구원의 천사로, 또 누군가의 참사람으로 기억될 내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절실하게 두 손을 모은다.



  하루의 문을 열면
  마주치는 이들의 얼굴빛이 늘 아름답고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언제나 이웃부터 먼저 배려하는
  넓은 가슴의 우리가 되게 하소서

  두 귀를 쫑긋 세운
  우리의 긴장된 식탁에
  봄날의 기운을 불어넣어
  매사 활력 넘치고 포근하게 하소서

  소방차가 떠난 차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신발을
  다시 반듯이 신고 나설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며

  고된 임무를 뿌듯이 마치고 돌아와
  포근히 기대는
  우리 보금자리의 선물 같은 온기가
  늘 한결같게 하소서

  나무 한 그루, 들짐승 한 마리마저
  우리의 참된 사랑으로 감싸
  온 세상 모두가
  온전히 안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