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에세이 53번째 편지
사랑의 인사

글 : 피혜림(참사람 독자)

“안녕하세요?”
세상에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 있을까요? 어린 시절엔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했는데 자라면서 점점 줄었습니다. 몸과 함께 커지는 욕심과 달리 세파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고, 어두운 마음의 조각들이 나의 영혼을 날카롭게 찔렀습니다.

2017년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꿈은 좌절되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온 세월들이 원망스러워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습니다. 늘 미래를 향해 달리던 마음이 과거로 회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은 누굴까?’

방황하던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사랑을 전해 준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빠는 외지를 떠돌았고, 우리 남매는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성장했습니다. 무시당하고 소외되는 일들도 많았고, 저는 배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살아내느라 바빴습니다. 숨 가쁘게 살다 보니 가난의 부끄러움을 벗었고, 힘겹게 짊어졌던 장녀의 무게도 내려놓았지만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 이제 오롯이 나를 위한 삶을 시작하면 되는데 밤이면 밤마다 달을 바라보며 의미를 찾아 헤맸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는 별들. 굶주린 나의 초승달은 별들의 응원을 받으며 둥근 영혼의 살을 찌워갔습니다. 수많은 별이 반짝였지만 그중 몇 개의 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나의 별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문방구에서 마주친 어느 아주머니입니다. 등굣길에 미농지를 사기 위해 문방구에 들렸습니다. 문방구 아저씨가 미농지를 꺼내 주시는 동안 저는 종이 뽑기를 보았습니다. 평소 친구들이 종이를 뜯어서 아저씨에게 보여주면 물고기 엿이나 이러저러한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에 나도 한번 뜯어보자고 하나 뽑았는데 작은 엿이 나왔습니다. 아저씨가 엿과 미농지를 내밀며 100원이라고 말하자 당황했습니다. 미농지 값 50원만 달랑 들고 왔는데 뭔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뽑아 버렸으니 꼼짝없이 빈손으로 등교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어느 아주머니가 50원을 대신 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했던 그분의 아름다운 마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버스에 올라탔는데 잔돈이 없어 당황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나 도서관에서 인쇄를 해야 하는데 카드를 소지하지 않은 학생을 만났을 때 그 날을 생각하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나의 별은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매우 깔끔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는 부지런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에게 꼬질꼬질한 제 모습이 안타깝게 비췄던 것 같습니다. 집에 욕실이 없어 겨울이 되면 목욕은커녕 머리도 자주 감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더러운 제 모습에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피아노 수업이 끝나면 끓인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조용히 준비해 주셨습니다. 저는 쪼그리고 앉아 따뜻한 물에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나서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왜 내게 물을 끓여 주실까?’하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 깊이 고민하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겨울이면 선생님이 끓여주시는 미지근한 물에 머리를 감았습니다. 제가 6학년이 되는 해에 선생님은 시집을 가셨고 이별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떠난 후, 겨울이면 연탄불에 올려서 끓인 물에 스스로 머리를 감았습니다. 아직도 가끔씩 머리를 감을 때마다 선생님의 배려가 떠오릅니다. 현재 공부방을 운영하는 저는 선생님 덕분에 생활습관이 부족한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편견이 아닌 연민으로 감싸주는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나의 별은 경찰 아저씨입니다. 남동생과 함께 조손가정으로 자라면서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연말이면 면사무소에서도 라면이며 쌀이며 도움을 주는 손길이 좀 더 많았는데 경찰 아저씨도 그중 한 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과 함께 방문해 주시며 열심히 살아가라고 응원해 주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우리를 부르는 경찰 아저씨의 목소리에 반갑게 문을 열고 기쁘게 맞이하던 따뜻한 겨울이 떠오릅니다. 행복은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종종 잊는 순간이 많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니 행복은 이렇게 또 제 옆에 와서 미소 짓고 있습니다.

네 번째 나의 별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입니다. 박철규 선생님은 뛰어난 학생뿐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학생도 두루두루 살피는 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욕심은 많았지만, 자신감이 부족해 앞에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내면을 알아채셨는지 동시 암송대회를 권해주셨습니다. 저는 부끄러워 머뭇머뭇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교실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던 그 날의 따스한 풍경을, 선생님이 건네주시던 두툼한 원고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원고를 받아든 날부터 열심히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한 권에 달하는 동시를 빠짐없이 반복해서 외웠기에 저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드디어 대회 날 많은 참여자와 학부모 앞에서 암송을 했고, 처음으로 교외 대회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선생님이 주신 그 기회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 이후로 저는 작지만, 희망적인 자신감을 지닐 수 있었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나의 별은 익명의 후원자입니다. 매달 후원금을 보내주던 분이 계십니다.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후원하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따듯한 마음을 본받아 지금은 정서적으로 힘든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고 응원을 주는 정도의 봉사만 할 수 있지만 좀 더 경제적인 안정을 이뤄 제가 받은 장학금의 혜택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안의 감정은 달처럼 차고 기울기를 반복합니다.
‘세상은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방해하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돈만 벌어야 하는 걸까? 가족은 왜 나를 지원해주기는커녕 의지하고 빼앗아 가는 걸까? 나는 왜 최선을 다하는데 인정받지 못할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왜 없는 걸까?’

어둡고 컴컴한 마음에 찾아 든 참사람, 아름다운 사람들. 월식이 영원할 것만 같이 눈앞이 깜깜한 순간에 나의 존재를 일으키고 의미를 되찾을 수 있었던 힘은 스치는 짧은 인연 속에서도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사 하나는 동네에서 제일 잘했던 어린이가 어느새 부끄럼쟁이로 변했습니다. 분리수거를 하다 만난 경비아저씨에게도, 물건을 계산해 주는 점원에게도, 단체 활동에서 처음 만나는 조원에게도 언제부터인가 반가운 인사보다는 쑥스럽게 뒤로 빠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잊고 살 수 있었을까 반성했습니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참사람이 넘쳤는데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약한 내 마음이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저는 뒤늦은 사춘기를 가뿐하게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나’에 갇힌 알을 깨고 ‘아름다운 사회’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전보다 건강한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일상 속에서 잔잔한 사랑을 전하는 참사람이 되어 보려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이 넘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더 많은 여운을 전파하려고 합니다. 반갑게 인사하면서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