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에세이 60번째 편지
안개꽃

글 : 김남숙(참사람 독자)

대전에서 출발하여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탄 것은 새벽 4시경이었다. 기사는 출입구에 서서 승객들을 맞이하며 트렁크를 짐칸에 실어주었다. 차에 오르다 보니 ‘당신은 장미꽃을 피우십시오. 저는 안개꽃이 되렵니다.’ 라는 글귀가 실린 액자가 운전석 위에 걸려있었다. 기사님이 어떤 분일까 슬그머니 호기심이 생겼다.

버스 실내등이 은은한 무드 등으로 바뀌었다. 공항까지 3시간 남짓 단잠에 빠졌다가 시끄러운 노랫소리에 잠에서 깼다. 처음 들어보는 외국 노래였다. 창밖을 보니 공항에 거의 다 온 듯했다.

“승객 여러분! 제가 먼저 내려서 짐을 꺼내는 동안, 놓고 가는 물건 없이 천천히 내리십시오. 그리고 방금 들려 드린 음악은 베트남 국가와 가곡입니다. 이 차에는 친정 나들이를 하는 베트남 신부가 타고 있습니다.”

승객들은 신부와 안개꽃 기사님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다. 기사님의 사려 깊은 마음이 메마른 내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 주었다.

아이들은 혼자 다 큰 것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았고, 남편도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었다. 내가 없으면 몇 시간도 지탱할 수 없을 것 같던 가족들이 이제는 나를 귀찮아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늘어지고 쓸쓸하기만 했다. 직장에서도 삼십 년 넘게 같은 일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처음 발령을 받고 두근거리던 마음이 시들해지고 타성에 젖어 일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처럼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저절로 삶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마치 그 물결이 나를 제치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질퍽거리는 삶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휴가를 내고 빠른 시간에 출발할 수 있는 여행 상품을 골랐다. 여행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어디든 이 도시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생각 없이 걷고 싶었다.

공항 로비에서 비행기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기사님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승객 중에 베트남 신부가 타고 있다는 것, 그녀가 친정에 신행을 가려 한다는 것까지 파악하고 그 나라 국가를 틀어 준 기사님은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가족과 일을 위해 살아왔다고 스스로 단정했던 삼십 년의 시간들을 새롭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 자식들이 남보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다니기를 바라고 뒷받침했던 시간들, 남편이 좀 더 나은 자리로 승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도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남편과 아이들이 스스로 장미꽃으로 피어나는 것을 기뻐하기보다 나의 장미꽃이 돋보이도록 나를 둘러싸고 피어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나는 장미꽃을 피우고 싶어 안달하며 살아온 것 같다. 때로는 스스로 장미꽃인 양 화사하게 뽐내며 살기도 했다. 장미꽃으로 피어있는 시간만 허용되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미처 몰라 시들어가며 목말라했던 것 같다. 장미꽃보다 조명은 덜 받지만, 주변을 편안하고 향기롭게 하는 안개꽃. 이제부터 나는 안개꽃이라고 생각하니 움츠린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낀다.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이번 여행에서 건질 절반의 소득을 얻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