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36.5˚C

참사람 에세이 95번째 편지 

우리들의 준구

글 : 김동호(참사람 독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참사람이란 단어를 비웃었을 것이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똑똑한 체 하면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환경에 지배를 받는 어처구니없이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만했지만 확고했던 나의 인간관은 의경을 가게 되면서 깨지게 된다. 만약 이 관념이 물체였다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박장대소하듯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그것을 깨트린 것은 군대의 폐쇄성도 아니고, 부조리함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강준구였다.

머리를 빡빡 깎고 생전 처음 겪는 낯선 상황에 던져진 나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통제되었고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나를 지워야 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되어서 그런지 나의 설움은 더욱 커졌다.

기강잡기와 부조리의 경계가 모호한 군대 시스템 안에서 참으로 빛나던 존재가 준구였다. 소대 내에서 준구는 조용하고 과묵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그를 좋아했다. 선임들은 준구에게 장난도 잘 치면서도 챙겨주고 후임들을 그를 잘 따랐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두루두루 친하게 잘 지낼까 라는 궁금증이 생기곤 했다. 그리고 첫 근무 때 그 이유를 바로 알게 되었다.

의경 특성상 경계 근무를 서는 일이 많았다. 문 하나를 두 명이 맡아서 경비하면서 시위자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 근무였다. 긴급 상황이 없는 보통의 경우 할 짓이라고는 이야기 밖에 없었다. 주로 하급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상급자를 재밌게 만들어야 했다. 말주변도 없고 끼도 없는 나에게 ‘자기를 재밌게 해봐라’ 라는 선임의 말은 상당한 부담이었고 근무 때면 평범한 이야기를 부풀리고 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각색해야 했다. 준구는 그런 선임들과는 많이 달랐다.

준구와 근무를 서게 된 날, 준구의 첫 마디는 “굳이 억지로 짜내서 이야기 안 해도 돼.” 였다. 아마 그 순간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모든 소대원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게 되었다. 그는 타인을 편안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쉬워 보이나 막상 하기엔 어려운 타입의 일이다. 타인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남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준구는 두 가지 미덕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준구는 항상 모범을 보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눈치를 보면서 슬쩍 뒤로 빠지거나, 후임에게 시켰을 일도 먼저 나서곤 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준구의 행동은 예측이 너무나 가능했다. 만약 무게가 각기 다른 여러 개의 짐들을 옮기는 일이 있다면, 준구는 누구보다 빨리 튀어나와 가장 무거운 짐을 골라서 옮겼을 것이다. 묵묵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땀을 흘리며 짐을 옮길 그가 연상된다. 준구는 단순했고 누군가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올곧음이 좋았다.

인간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그는 멋진 사람이었다. 준구는 여러가지 잡다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 역사, 영화, 문학 심지어 축구까지 여러 방면에서 박식했고 흥미롭게 전달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지식은 독서에서 비롯되었다. 준구는 대외활동을 할 때마다 책을 사와서 읽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좋아했다.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 문학을 즐겨 읽었고 침상에는 꼭 한 두권씩 책이 놓여져 있었다. 한 번은 나의 생일날 체호프 단편 소설집을 선물해주었다. 아이러니하게 삶의 단면을 묘사한 소설들은 매우 흥미로웠고 그날을 계기로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든 준구는 책을 통해 얻은 풍성함을 나눠주곤 했다.

준구의 소통능력 역시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소대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중구의 어느 노인복지센터에 가서 어르신들께 스마트폰으로 문자나 전화하는 법,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는 법 등을 알려드리는 일이었다. 어르신들은 역시 전자기기에 익숙하시지 않았다. 말로 설명을 해드려도 이 버튼인지 저 버튼인지 헷갈려 하시기 일수였고 잘 기억하시지 못했다. 몇몇 소대원들은 대충 알려드리고 쉬고 있었음에도 준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글로 설명서를 만들어서 알려드려도 용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노트를 찢어서 그림으로 설명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십자표시를, 그 다음에는 앨범을 눌러서 사진을 선택하시면 돼요” 라고 천천히 설명하며 시범을 보이는 준구는 분명 돋보였다.

준구의 행동은 가식적이거나 인위적인 느낌은 없었다. 선거철 정치인의 억지스러운 굽신거림이나 미소와는 결이 달랐다. 준구의 행동은 꽃을 방안에 두면 향기가 퍼지듯 인간됨에서 자연스럽게 스며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준구를 좋아했다. 보통 선임이 전역하면 시원섭섭함이 들기 마련이다.

준구의 경우는 다른 선임들보다 섭섭함이 더욱 컸다. 좋은 형이나 친구가 전혀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큰 종이를 사서 롤링페이퍼를 적었다. 준구는 뭐 이런걸 다 준비했나며 쑥스럽게 웃었고 혹시라도 종이가 구겨질까 조심스럽게 챙겼다. 지금도 준구의 방에는 롤링페이퍼가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액자에 걸려있다.

결국 군생활을 통해 나는 참사람의 가치를 배웠다. 나에게 참사람의 기준은 준구였다. 남을 조금이나마 더 배려하고, 좀 더 소통하고, 이 모든 것을 진심으로 노력한다. 무엇보다도 준구는 자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준구로 인해 많은 부조리가 사라졌고, 경직되었던 소대 분위기는 좀 더 부드러워졌다. 나 스스로도 좀 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지,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믿지 않았던 냉소적인 나를 바꿔 주었다.

이처럼 참사람은 거창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묵묵히 다른 이의 모범이 되며 세상을 바꾼다. 이것이 내가 준구를 통해 배운 가장 큰 가치이다. 언젠가는 나 역시 이렇게 참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희망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