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에세이 마흔 일곱 번째 편지
오, 놀라운 유산

글 : 이경화(참사람 독자)

머그잔에 따뜻한 원두커피를 담아 창가로 다가간다. 커피 한 모금 마신 후 도시의 풍경을 한갓지게 톺아본다. 층수를 헤아리기 힘든 고층 빌딩들과, 도로 위를 빼곡하게 메운 차들과, 뭐가 그리 바쁜지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수많은 도시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내 온 몸을 짓조르는 듯하다.
 그 때, 화려한 도시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노인의 모습이 내 눈 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손수레를 끌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위태롭게 차들 사이를 헤집고 걸어오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다 서둘러 로비를 향해 뛰어 내려간다.
 건물 현관 입구에 서서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노인의 모습을 찾아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노인의 모습은 없다. 순간 온 몸에 힘이 빠져 무춤거리다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결혼과 동시에 도시에 정착하면서 처음 시작한 일은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보습학원이 안정을 찾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달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나온 헌 교제들의 양은 상당했다. 헌 교제들이 쌓여가다 보니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고물과 파지를 주워 모으는 노인을 학원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노인을 보며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추억하게 되었다.

그분이 남 같지 않아 보여 아무 사심 없이 헌 교제를 무상으로 내어드렸다. 노인은 매달 말일이 되면 어김없이 학원을 찾아와 헌 교제들을 실어갔다. 난 노인의 방문 날짜에 맞추어 헌 교제를 잘 정리하여 내어 드렸다.
 “어이쿠, 이거 너무 고마워서 어쩐다. 감사의 표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매달 이렇게 찾아오셔서 헌 교제 가져가 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한사코 감사의 표를 하겠다는 노인에게 손사래를 치며 거절 했다. 노인에게 차를 대접하고 때론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노인은 내가 베푼 호의의 당황스러워 했지만, 나는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분을 성심성의껏 대접했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분이 독거노인이란 것과 십 년 전에 아내가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나면서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연락조차 끊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인이 처한 현실에 가슴이 아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남편 역시 딱한 노인의 처지를 알고 틈틈이 집으로 모셔 식사를 대접했고, 김장김치를 담아 전해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어린 아들은 노인에게 마음을 열고 잘 따랐다. 노인은 틈틈이 시간을 내어 어린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노인에게 정이 든 어린 아들이 노인과 함께 살고 싶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애를 먹었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 헌 교제를 실러 온 노인이 웬 어린이용 자전거를 가져왔다.
 “아니, 어르신 이게 뭔가요?”
 “지난번에 성수가 자전거가 갖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동안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내가 하나 장만했으니 성수 가져다주시구려.”
 “어르신,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노인은 아들에게 꼭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헌 교제를 실고 유유히 사라졌다. 자전거를 받아든 어린 아들을 헤벌쭉 웃으며 좋아했다. 남편도 노인의 성의를 고맙게 여겼다.

그런데 그날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노인은 더 이상 학원에 찾아오질 않았다. 헌 교제가 쌓여 놓아둘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였는데도, 노인은 학원에 찾아와 헌 교제를 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인근 고물상에 연락해 헌 교제를 실어가게 했다. 고물상 직원이 헌 교제를 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노인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씁쓸했다.  
 
시간이 흘러 노인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질 때쯤, 무슨 영문인지 아리잠직한 동사무소 여직원이 학원에 찾아왔다. 갑작스런 동사무소 여직원의 방문에 학원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찾아온 줄 알고 덴겁했다.
 “혹시, 김상태 할아버지라고 아신 가요?
 “……김, 김상태 할아버지요?”
 난 잠시 기억을 더듬어 김상태란 이름을 곱씹어보았다.
 “아, 혹시 손수레를 끌고 다니시면서 파지 주우시던 할아버지 말씀하신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연락이 끊겨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내 말에 동사무소 여직원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어린 아들의 이름을 묻더니 뜬금없이 통장 하나를 건네는 것이었다.

 “이게 뭔가요?”
 “김상태 할아버지께서 이성수 어린이에게 남기신 겁니다.”
 “……네?”
난 몹시 당황스러워 여직원을 일별한 후 통장을 열어보았다. 컥, 그런데 예상외로 꽤 큰 금액이 들어 있었다. 노인이 몇 년 동안 일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을 만한 금액이 통장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걸 왜 제 아들에게?”
 “김상태 할아버지께서 유가족이 없으셔서 성수 어린이를 상속인으로 해두셨더라고요.”
 “상속인이요? 그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내 물음에 동사무소 여직원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순간 난 너무 놀라 어칠비칠할 정도였다. 여직원이 돌아간 후 난 오랫동안 통장을 내려다보았다. 통장에 입금된 숫자를 보니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 돈을 모우기 위해 고생했을 노인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비록 노인이 어린 아들에게 남긴 것이라고는 하나 통장과 나 그리고 어린 아들 사이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가 존재하는 듯해 도저히 통장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편과 상의해 노인이 남긴 통장을 들고 동사무소를 찾아 독거노인들을 위해 사용해달라고 노인의 이름으로 기부했다. 기부하고 돌아오던 길, 돌아가신 노인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빵빵 거리는 차 소리에 먼 기억에서 돌아왔다. 폐지를 줍는 노인을 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나보다. 그분과의 만남은 화려함만 추구하다 놓친 것들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자기 것이 아님에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타인에게 상처를 안겨주는 것쯤은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뼈저리게 뉘우치게 된다. 베풂에 인색했던 내 인생 속에 노인은 너무도 아름다운 유산을 안겨주고 떠나셨다. 머릿속 자꾸 떠오르는 노인의 모습 위에 ‘아름다운 사람’이란 문구를 새겨 넣은 후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분이 남기신 아름다운 유산이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