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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그리고 학습의 콩나무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악플로 사람이 죽는다. 전쟁보다 더 무섭다.

, 총 한방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악의에 찬 메시지를 되씹고 되짚다가 그 말들이 목숨을 베어내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으로 벼락거지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가난보다 더 무섭다. 돈이 없어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파 눈이 충혈되니 해결이 불가능하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갑질을 낳고, 악플을 낳고 우울증을 낳고 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길래, 충분한 음식을 놓고도 먹을 것이 없고, 바빠서 허덕거리면서도 악플을 달고야 마는 걸까?

 

물론 인간이 이렇듯 악하게만 사는 건 아니다. 도처에 선행이 있다. 익명의 기부자에 대한 기사는 해를 거르지 않고 나오고, 갑질을 당한 어느 식당에는 사람들의 입금이 이어진다. 지하철이나 강물에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사람을 구하기도 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수십년씩 돕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듯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걸까?

 

이런 딜레마에 대해 성선설과 성악설이 답한다. 인간은 본디 악하니 반드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 혹은 인간은 본디 선하니 악행을 저지르도록 만드는 사회적 장치를 걷어내면 된다는 처방이 이어진다. 좀 더 정교하게는 호모 루덴스, 호모 파베르, 호모 스투디어렌 등의 용어가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조명하기도 한다. 우리는 본래 놀이하는 존재이므로, 사물을 만드는 존재이므로, 사교적 존재이므로 오늘날의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등등. 이런 규정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규정으로 나는 오늘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즉 학습하는 인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별 내용이 없는데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동화들이 있다. 잭과 콩나무가 그렇다. 위키디피아가 정리한 동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느 곳에 홀어머니가 멍청한 외아들 잭을 기르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지자, 어머니는 집안에 겨우 내다 팔 만한 소 한 마리를 잭에게 주면서 팔아서 먹을 것을 사 오라고 한다. 게으름뱅이 잭은 길을 가다가 어떤 아저씨를 만나 신비한 힘을 지닌 콩 3개와 소 한 마리를 바꿔버렸다. 집에 돌아가니 소를 콩으로 바꿨다며 화난 어머니가 콩을 밖으로 던졌는데 하룻밤 사이에 크고 아름다운 콩나무로 자랐다.

 

잭은 하늘까지 자란 콩나무에 올라가 하늘나라에 있는 거인의 성에 도착했는데, 잭을 본 거인 성의 하녀는 성 주인은 인간을 잡아먹는 오우거(Orge)이니, 빨리 도망치라고 한다. 마침 거인이 돌아와 하녀는 잭을 숨기고 거인은 황금알을 낳는 닭을 꺼내 가지고 놀다 잠든다. 거인이 잠든 후 잭은 황금알을 낳는 닭을 훔쳐서 집에 돌아온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닭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물어봤으나 잭은 길에서 주웠다고 둘러댄다. 그리고, 닭을 키우면서 황금알을 낳아 비싼 값에 내다 팔게 되면서 집안 사정도 점점 나아지게 되었다.

 

 그 후 잭은 또 다시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 숨는다. 거인은 이번에는 금화와 은화가 든 자루를 꺼내어 세면서 놀다가 또 잠들었으며 잭은 자루를 가지고 내려온다. 세 번째로 잭이 올라갔을 때 거인은 노래하는 하프를 꺼내어 가지고 놀다가 또 다시 잠든다. 잭이 노래하는 하프를 가지고 가는 중에 하프 소리가 났고, 거인이 깬다. 급히 지상으로 돌아온 잭은 콩나무를 도끼로 베었고, 쫓아오던 거인은 추락사한다. 이후 잭은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게 된다.

 

다시 읽어봐도 이 동화에는 권선징악의 교훈도, 사필귀정의 후련함도 없다. 하지만 [잭과 콩나무]는 여전히 여러 판본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영화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 동화가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채워주고 있어 이렇게 지속되는 것일까? 하나의 답은, 잭이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타산적인 우리 평범한 사람들을 닮았다는 점일 거다. 잭은 게을러서 엄마에게 매일 야단맞는데다가 전 재산인 소를 콩 세알과 바꿀 정도로 멍청하다. 동시에 이것저것을 훔치기도 하도 슬쩍 거짓말도 한다. 내세울 어떤 장점도 없고 그리 도덕적이지도 않은 잭이 주인공이라는 것. ‘올바름에 포획되어 있는 뛰어난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훨씬 너그럽지 않은가?

 

좀 더 자세히 보면, 멍청함의 이면이 재미나다. 잭은 생명의 위협이 있어도 콩나무를 올라 거인성에 도달하며,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거인의 물건을 훔친다. 한번만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이다! 잭은 부모들이 싫어하는 게으르고 멍청한 아이이고, 그래서 세속적 성공코드에 비추어보면 열등한 존재지만, 내면의 에너지가 엄청난 가능성의 존재. 잭은 단호하게 언제나 다음 경험으로 나아간다.

 

이성적으로나 도덕적 차원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동화가 생명력을 유지해 왔던 것은, 아마도 이런 가능태의 매력때문일 것이다. 잭은 제멋대로라는 야단을 들을 만큼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며, 자기 판단을 신뢰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세속적으로는 멍청하지만,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지고 있다.잭이 소와 바꾼 것은 콩으로, 콩은 씨앗이다. 얼마나 클 지 아무도 모르는 씨앗을 선택한 것이다.

 

잭의 콩나무는 그 크기를 하늘까지 확장한다. 하룻밤 새 자라 하늘에 닿아버린 나무. 동화적 환타지로, 잭의 콩나무는 가능성의 현실화를 이렇게 멋지게 이루어낸다. 잭이 믿었던 가능성이 현실화되자, 잭은 현실화된 가능성을 확인하러 하늘을 방문하고, 과감하고 무모하던 땅의 멍청함을 멋진 전략으로 행사한다. 물론 그 전략은 대성공이다.

 

 



잭은 호모 에루디티오, 즉 학습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호모 에루디티오는 정해진 본성이 없는, 가능성과 개방성의 존재이다. 학습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도 될 수 있고, 어떤 상황도 수용할 수 있다. 잭에게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동화가 주는 교훈은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게으름은 거인성에서의 민첩함이 될 수 있고, 지상에서의 멍청함은 거인성에서의 지략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열려진 가능성이 학습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호모 에루디티오의 반대편에는 편견이 존재한다. 편견은 학습을 못하게 하는 일종의 심리적 철망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할 뿐 아니라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잭에 대해 게으름뱅이나 멍청이라는 편견을 가졌다면, 이런 잭이 훌륭하게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이야기는 황당하게 들릴 것이다. 만약 잭이 스스로에 대해 이런 편견을 가졌다면, 잭은 스스로를 멍청이라 비난하면서 방안에 갇혀 꼼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소를 콩과 바꾸지도, 콩나무를 타고 하늘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고, 결국 콩나무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현실은 편견 쪽이다. 두뇌는 인지구두쇠의 원리에 따라, 상대를 범주화하고 낙인을 찍어, 고려대상에서 손쉽게 배제해버린다. 흑인이 셈을 못하면, 원래 흑인은 지적인 능력이 떨어진다고 믿어버린다. 이렇게 하면 상대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한 판단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규정을 넘어서는 상당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편견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나의 편견의 원천을 알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전 재산을 콩 세 알과 바꾼 사람을 나는 어떻게 보는가? 내 인생에서 콩나무를 오르는 것과 같은 위험을 감수한 적이 있는가? 내가 가진 편견의 근원은 무엇인가? 혐오와 적대, 차별을 낳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통찰력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자기 내면에 대한 지식, 역지사지의 태도, 감정에 대한 성찰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우리의 상식 속에는 가능성과 개방성을 차단하는 방패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유유자적하는 잭을 게으름뱅이로 몰아가는 시선, 호기심을 멍청함으로 규정하는 규범은 학습하는 인간을 무력화한다.

 

[잭과 콩나무]가 좋은 동화인 이유는, 이 동화 안에 상식의 방패에 작은 구멍을 내는 예리한 바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손쉬운 편견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존재가 호모 에루디티오다.

 

잭이 하늘에서 마지막으로 가지고 내려온 물건은 하프다. 하프의 소리는 잭의 존재를 발각되게 하고, 결국 밤낮으로 돈을 세던 거인을 죽게 만든다. 잭이 스스로를 드러내게 한 모멘텀, 돈의 축적에 취해있던 자본을 닮은 거인을 거꾸러뜨린 힘이 예술이라는 말이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성을 알게 되고, 그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학습하는 인간의 중심에는 예술이 있다.

  

호모에루디티오는 완성형이 아니다. 계속해서 되어가는(becoming)’ 존재다. 자신에 대한 규정을 넘어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 중인 존재(being-in-process). 성인이나 노인도 예외가 아니다.

 

창신동에서 수십 년 간 봉제일을 하던 김모씨는 디제이로, 강사로 되어가는 중이다. 그는 라디오학교에서 여행방송을 시험 삼아 제작하면서 미디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회를 거듭하다가 디제이를 맡게 되면서 사람들의 사정을 더 많이 듣고 정리하여 이야기하는 능력을 키웠고, 마을미디어 네트워크에서 이런 소식을 나눴다.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 생각지 않았던 강사를 하게 되었다.

 

시흥에 살던 한모씨는 참이슬마을학교에 등록해서 마을코디네이터 양성과정을 이수했다. 함께 등록한 몇 명 이수자들은 여러 활동을 시작했고, 영화상영, 마을노래 만들기, 마을살이 안내서 제작, 마을의제 발굴, 마을 환경감시단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퇴직 후 무료하게 보내던 일상이 완전히 달라졌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이제는 꽤 알려진 마을 활동가가 되었다.

 

홍천의 이모씨는 친구인 주부들과 함께 가족 교육프로그램에 등록했는데, 그 이후로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친구들이 함께 학부모 역할을 어려워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을 돕다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주여성들과의 만남과 다문화 교육자들 간의 만남이 이어져, 이모씨는 교육 코디네이터가 되어가고 있다.

 

봉제노동자에서 디제이로, 퇴직자에서 강사로, 주부에서 교육자로, 회사원에서 사회운동가로 되어간사례들이다. 오산에서도 이천에서도, 제천이나 울산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이런 전환은, -일터만 오가던 이원적 삶의 축에 라디오 스튜디오나 마을모임, 마을학교와 같은 새로운 축이 하나 더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새로운 활동의 축은 그간의 정체성을 바꾸었고, 사람들은 더 넓은 네트웍을 만들어 나갔다.

 

 

 

어떻게 성인기에 정체성이 변화했을까? 평생학습의 공간이 기존의 정체성을 내려놓게 해서다. 마을학교나 라디오학교, 문해학교나 다문화교실은 전형적인 평생교육을 하는 곳으로, 이곳의 특징은 누구든지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주민들은 배우는 위치가 되자, 그간 말하지 못했던 수줍은 꿈들을 내비쳐보였고, 그것이 인정되고 실현되는 공간 속에서 다른 존재로 되어갔.

 

학습공간은 몰라도 된다는 관용의 공간이다. 배움의 본질에 주목하면, 이권이나 경쟁이 사라지는 평등의 공간이 된다. 주민들은 학습자라는 마음편한 정체성 속에서, 주저하던 일들에 도전하며 다른 존재로 되어갈 수 있었다물론 평생학습은 모양 좋은 외피로만 작동할 수도 있다. 평생학습도시를 내세워도 학원식 교육이 확장되는 결과 이상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배운다는 것을 모르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는 인식이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울이나 혐오, 비난의 문화를 체득하는 과정이 학습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악플을 왜 다는가? 과거의 억압을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 발산하면 된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갑질을 왜 하는가? 인간의 품위보다는 폭압적 권력행사의 짜릿함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은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인 습(, 익숙한 습성들)을 학(, 재조명하는 배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다. 습에 대한 학이 안 되면, 타인의 상처를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그래서 개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이 평생학습이다. 자신의 내면의 습성들을 가치의 차원에서 조명하고 배워나가는 하는 과정이 평생학습이다. 배움을 통한 존재의 변화는 그간의 배움을 넘어서서 타인과의 교류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시작되거나 증폭된다.

 

호모 에루디티오의 존재조건이 배려와 돌봄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봉제인과 퇴직자와 주부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인정하고 지지한 사람들 혹은 사람들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리치가 말했듯, 창조는 사람들이 만남과 배움을 통해 함께 기뻐하는 공환(共歡, conviviality)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고립된 를 벗어나는데서 시작된다. ‘보다는 우리가 우월하다는 믿음을 가진 시민들이 서로를 환대하고 모이면, 학습은 창조가 되고 민주주의가 된다.

 

어디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배움을 위해 모일 수 있는 공간에서다. 이런 점에서 평생교육 정책이 중요하다. 정책은 건물의 골조와 같아서 사람들의 생활 반경을 만들어준다. 내벽이 있으면 지나갈 수 없고, 싱크대 앞에 침대를 둘 수는 없다. 학습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삼는다. 모르는 존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책은 학습자들이 스스로 학습을 조직하는 공간에는 기본적으로 평등한 소통이 작동하도록 골조를 설계해야 한다. 교육자는 지식전달자가 아니라 촉진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기관이 아니라 공간이, 수업이 아니라 집담회가, 지식이 아니라 담화가 더 교육적이라는 인식이 그 설계의 도면이 되어야 한다. 평생교육정책이라면, 인간의 잠재력과 개방성을 키워주는 지향성을 그 안에 담고 있어야 하며,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되어감을 기다려줄 수 있는 문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지향하는 대로 변화하는, 무서운 존재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학습을 통해 얼과 꼴을 갖춘다. 평생학습은 여러 나라에서 공환의 매개가 되어왔고, 이를 통해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 미국의 흑인 차별문제도, 브라질의 빈곤문제도 자기 안의 편견을 깨닫고 공동의 행동을 촉진한 학습프로젝트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사회적 모순과 개인의 내면은 긴밀하게 연동하므로, 나의 내면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타인과의 연대를 이루어 나가는 학습이 진행된다면 사회문제는 해결된다. ‘내 안의 사회사회 속의 나가 바꾸어가는 인간의 놀라운 본성에 주목하자. 호모 에루디티오 시간은 항상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