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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 인터뷰

‘주먹’ 대신 ‘주걱’을 쥔 사나이, 도시 빈민의 동반자 <바하밥집> 김현일 대표를 만나다

김현일(바하밥집 대표)

 

체감 기온 영하 20도의 한파가 절정이던 어느 날, 남자는 여러 개의 생수통에 따듯한 물을 담아 신문지로 칭칭 동여맸다. 거리에서 잠드는 노숙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며 부디 얼어 죽지 말라고, 생수통의 온기로 체온을 지키고 내일 아침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비장한 약속을 건넸다.

 

남자는 하수구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여성 노숙인을 발견했다. 생수통을 들고 가까이 다가선 그는, 탯줄도 채 떼지 못한 아기가 그녀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는 걸 보았다. 발달장애인으로 추정되는 여성 노숙인은 아기가 어떤 상태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남자는 황급하게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아기는 이미 차갑게 식은 뒤였다. 

 

어떻게 세상이 이러한가. 엄마의 젖 한 번 물어보지 못한 아기가 이렇게 거리에서 죽어도 되는 것인가. 신실한 교인이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설을 뱉기도 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꼴까지 보여주시는 것이냐고,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다고.

 

거리에서 노숙인들을 만나기 시작한 그 날로부터 남자는 매일같이 이러한 고뇌와 번민을 겪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끓었고, 어떤 사람은 남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래도 그는 노숙인들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누군가가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도시빈민을 위한 거리의 급식소 <바하밥집> 김현일 대표다.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그를 만나 참사람의 가치를 들어보았다.

 

변화의 시작, 가족

그는 과거의 자신을 '꿈도 희망도 없던 구제불능의 건달'로 회고한다. 유복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인생의 무수한 시행착오는 그를 조직의 세계로 이끌었다. 1994년, 지명수배가 떨어지며 숨을 곳을 찾아 몸을 피한 곳이 바로 금천구 시흥동의 신문보급소였다. 그 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변화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백 키로가 넘는 거구에, 온 몸에 문신이 가득한데도 아내는 제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고 해요. 그저 순수한 사람으로, 마냥 긍휼하게만 봤다고요."

 

막 태어난 아이를 받아 안던 그 순간의 희열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작고 어린 생명을 품에 안았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제 이 아이를, 가족을 위해 살리라. 하지만 혼인신고도 출생신고도 수배자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김현일 대표는 형사를 찾아가 자수했고, 우여곡절 끝에 기소 유예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안 해본 일이 없어요. 하루에 서너 시간씩 쪽잠을 자며, 오직 가족만을 생각했죠. 그렇게 돈을 모아서 어렵사리 사업체를 차렸는데 IMF를 만났어요. 아내는 둘째를 임신해서 만삭의 몸이었는데, 빚에 묶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죠. 결국 가족들을 처갓집에 맡기고 저는 반년 정도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했습니다. 무료 급식소를 찾아 끼니를 해결했고요."

 

어떤 날은 꼬박 이틀을 굶고 겨우 김밥 반줄을 얻어먹었다. 김현일 대표는 지금도 노숙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시절 느꼈던 감정들과 조우한다. 배식줄에 서서 밥을 기다릴 때의 처량함, 비참함, 자괴감, 죄의식, 서러움 등은 사라지지 않고 그들을 통해 다시 투영되었다. 

 

 

 

변화의 방향, 바하밥집

거리를 전전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 싶었다. 퀵서비스부터 치킨배달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재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 가장 많은 시기였어요. 그때 저희 앞집에 살던 김형국 나들목 교회 목사를 만나게 된 거죠. 연이은 사업실패로 실패감과 무력감에 젖어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며 제 안의 정의감, 열정, 책임감과 같은 좋은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바로 앞에는 성북천이 있었다. 어느 겨울 날, 그 곳을 거닐던 중 한 노숙인 가족을 마주쳤다. 60대 남자와 30대의 정신질환을 가진 여자, 그리고 행색이 말이 아닌 유치원생 또래의 두 아이. 그의 마음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김현일 대표는 김형국 목사를 찾아가 따져 물었다. “예배니 은혜니 백날 떠들어봤자 교회 코앞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때 김형국 목사의 질문은 김현일 대표를 녹다운 시켰다. “교회가 누구냐?” ‘어디냐’가 아닌, ‘누구냐’는 게 무슨 말일까. “나들목 교회도 교회지만 너도 교회다. 하나님이 네게 보여주시는 걸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마라.”

 

이듬 해 설, 김현일 대표는 주머니를 털어 컵라면 다섯 개와 빵, 우유, 뜨거운 물을 들고 안암동의 다리 밑을 찾았다. 바하밥집의 시작이었다. 

 

 

 

 

밥은 공공재다

컵라면 다섯 개로 시작했던 바하밥집이 지금과 같은 규모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느 날 30명이 오더니, 다음 날은 50명, 그 다음 날은 100명이 몰려왔다. 김현일 대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정도 사람도 턱없이 모자랐다. 정기후원자를 찾고 봉사자를 모집했다. 몸으로 부딪히며 조금씩 체계를 잡아갔다. 길바닥에서 천막을 치고 급식소를 만들다 주민들의 민원에 접기를 수 없이 반복, 지금은 신설동 대광고등학교 담벼락에 정착했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면서 게릴라 배식을 시작했다. 급식소를 통해 하루에 한 끼 겨우 먹는 그들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어 주먹밥과 샌드위치를 싸들고 직접 찾아다녔다.

 

“저는 ‘식량공공재’라는 말을 해요. ‘밥’이야말로 누구한테든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거죠.”

 

배가 고프면 인간으로서의 존엄 따위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지론이다. 밥 굶는 설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일반인 기준으로 500인 분의 식사를 겨우 200명의 노숙인들이 해치운다고 한다. 산더미같이 배식을 받고,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먹는다, 일종의 생존본능이다, 언제 다시 음식과 만날지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채워두는 식이다. 

 

“식사를 제공하며 조금씩 그들의 삶이 들여다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어째서 도시 빈민이 되었을까? 다시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자활 사례를 조사하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노숙자’가 아닌 ‘손님’

김현일 대표는 바하밥집을 찾는 이들을 ‘노숙자’가 아닌 ‘손님’이라고 부른다. 인간 대 인간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다. 그는 식사하러 오는 이들을 향해 퍽 허물없이 ‘형님’, ‘아우’하며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는 똑같은 노숙자겠지만, 이 안에서도 다양한 부류가 존재해요. 알콜이나 약물중독 등으로 자활이 어려운 ‘부랑자’ 형태의 서울역 노숙인들도 있지만, 나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남대문 지하도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의 경우 공중화장실에서 세수 하고 새벽같이 인력시장으로 가세요. 일감을 얻지 못하면 종일 폐지를 모으거나 수 킬로미터를 걸어 급식소를 찾죠.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한심해 보이겠지만, 이 분들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김현일 대표는 노숙자를 향한 흔한 편견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대부분 사업 실패와 같은 사건을 만나 거리에서 생활한다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노숙인으로 태어나는 사례가 절반 이상입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잉태되고 있어요. 노숙인 부모 밑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역시 같은 노숙인으로 성장했던 것이죠. 사지 멀쩡한데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으로는 이 분들을 설명할 수 없어요. 이분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밥은 얻어먹는 거고, 돈은 앵벌이하는 거예요.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살아온 분들에게 보편적인 가치 기준을 적용하기는 어렵죠.”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다. 그는 노숙인들에게는 내재적 동기가 없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어떤 일에 대한 보상과 체벌이 작용하는 외재적 동기 대신,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고 자발성을 발휘하는 내재적 동기가 필요했다. 그는 인문학 수업을 열고, 야구단을 꾸렸다. 미술 전시회를 개최하고, 전문가를 초빙해 사진촬영을 가르치고, 가죽 공방을 열었다. 그들에서 사는 재미, 성장하는 재미를 일깨우고 싶었다.

 

“쉽지 않아요. 잘 따라오시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무너져버리는 거죠. 다시 술에 의존하고, 난동을 피우기도 하고요. 평생을 살아오던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만무하죠. 조금 더 근본적인 예방책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강의 상류로 떠나다

노숙 생활을 ‘강’으로 비유했을 때, 가장 하류에는 부랑자라 불리는 중증 장애를 가진 이들이 있다. 김현일 대표는 상류를 향해 되짚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상류지점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청년 문제를 마주했다.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이 현재를 위한 사업이라면, 미래를 위한 투자는 예방사업입니다. 이는 곧 청년문제와 직결되죠. 좋은 공동체와 가족이 없는 청년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습니다.”

 

그는 시애틀로 떠났다. 페어스타트라는 기관을 만나 청년 자활 사례를 조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설립한 것이 바로 ‘푸른고래 리커버리 센터’다. 포유류인 고래는 무리 내 병 들거나 어린 개체들이 수월하게 호흡할 수 있게끔 수면 위로 밀어 올려주며 돕는 특성이 있다.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그런 고래와 같은 공동체가 되어주고 싶었다. 보육원을 퇴소한 청년들, 우울증을 겪는 청년들,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기성 노숙인들의 자활률이 10% 내외라면, 청년들은 80% 가깝게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 센터로 통학하는 친구들만 200명이 넘는다.

 

“미국 청년들은 성인이 되면 즉시 독립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노숙인 청년들이 많이 보이지만, 우리나라는 30대부터 50대까지도 가족들이 품고 있어요. 흔히 이야기하는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이죠. 미국 같으면 길거리에서 나와야 할 노숙인들이 우리나라는 가족 안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고립되어있고,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가족의 보호가 끝나는 날 결국 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죠. 언론에서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한다고 하는데, 웬걸요, 통계의 5배는 될 겁니다.”

 

그는 노숙인 문제에 관심이 없다면, 학대아동과 청소년, 청년과 미혼모 등 다른 분야에 마음을 열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우리 사회가 가진 이 모든 문제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결국 노숙이라는 강의 하류로 귀결된다는 논리다.

 

 

 

 

미안한 그 이름, 가족

김현일 대표는 현재 그룹홈 바나바하우스를 세우고 약 스무 명의 청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한 번의 세미나와 강의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루틴’의 정립임을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그래서 공동생활을 통해 스케줄을 만들고 코칭하며 청년들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과정이 그에게는 처음이 아니다. 신문보급소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열네 살 고아 청소년을 거두는 등 오갈 데 없는 처지의 동네 아이들과 숙식하며 보호자 역할을 해온 역사가 바하밥집 운영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몸이 아파 버림받은 소년을 양아들 삼기도 했다. 그는 요즘 들어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주 든다고 고백한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는데 돌보던 노숙인 한 명이 유서를 써놓고 사라졌어요. 어머니 유골함을 채 모시지도 못한 채 꼭 껴안고 녀석을 찾아다녔죠. 남해에서 번개탄을 피운 것을 겨우 발견해 응급실에 데려갔어요. 일생이 이러했습니다. 그들을 돕는다고 정작 딸들을 잘 챙기지 못했어요. 참 고맙게도 알아서 잘 자라주었는데 가슴 한켠에 맺히는 게 있죠.”

 

엄마, 아빠, 그리고 딸 둘. 이렇게 4인 가족으로 살아본 역사가 한 번도 없단다. 항상 집에는 도움이 필요한 술주정뱅이 삼촌들, 우울증을 겪는 오빠들이 바글거렸다. 어떤 날은 17살짜리 미혼모가 들어와서 딸들이 방을 내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리광을 부리지도 않고, 모든 일을 스스로 했다. 그렇게 걱정 한 번 끼친 적이 없는 훌륭한 딸들이었는데, 최근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아빠와 엄마를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사실은 아저씨들, 삼촌들한테 아빠 엄마를 뺐긴 것 같았어.’ 이 말은 김현일 대표의 가슴 깊숙한 곳에 와 박혔다. ‘미안하다. 우리 운명으로 받아들이자.’ 도시의 빈민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대표가 딸들에게 한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뻔뻔하다고 표현하면서도,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김현일 대표는 요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건강한 단체들은 설립자와 경영자가 분리되어 있는데, 자신의 영향력이 법인과 센터 곳곳에 미치는 현실이 다소 불안하단다. 열정과 재주가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이관하고, 그는 노숙인을 만나는 급식소 현장에 더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를 굽은 소나무에 비유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잖아요. 곧고 잘생긴 소나무는 목재가 되지만, 굽고 못생긴 소나무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으니 오래오래 선산을 지킨다는 이 말처럼, 못나고 망가진 제 자신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늘 언제나처럼 빈자와 아픈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작정입니다.”

 

굽은 소나무였던 그가 내린 뿌리들은 점점 저변을 넓혀가며, 새로운 새싹과 가지를 키워냈다. 센터에서 교육받은 청년들, 배식 받던 노숙인들이 이제는 다시 봉사자로, 활동가로 변모하여 자신과 같은 일을 겪고 있는 타인을 위해 경험과 지식을 나눔하고 있다. 그가 지키는 이 선산이 부디 우리 곁에 오래 남아주기를, 그리하여 그의 염원처럼 구성원 모두가 더 이상 고립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함께 연대하는 사회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