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교육재단 소식지「참사람 36.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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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 인터뷰

(2부) 슬기로운 시니어 생활 : 의사, 인생이모작과 웰다잉에 대해 이야기하다

유은실(서울아산병원 명예교수/허원미디어 대표)

 

“오늘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죽음 또한 좋은 방식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부캐’라는 말이 유행이다. 방송인 유재석은 트로트 가수 ‘유산슬’인 동시에 드러머 ‘유고스타’로 활동하고, 개그우먼 김신영은 ‘둘째이모 김다비’로 변신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해낸다. 부캐는 副(부)+character로, 개인의 직업적 흥미나 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이야기한다. 유은실 허원미디어 대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사이자, 번역가이자, 한글 연구가이자, 출판사 대표이자, 유튜브 방송인이며 동시에 교육자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이렇게 다양하게, 그리고 잘 해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유은실 대표의 참사람 인터뷰 2부에서는 은퇴 그리고 웰다잉이라는 주제로 슬기로운 시니어 생활의 비법을 들어보고자 한다.

 

남들보다 조금 일렀던 은퇴

유은실 대표는 30여 년 간 몸담고 있었던 서울아산병원 병리과를 작년 8월 퇴직했다. 정년을 2년 앞둔 시기였는데, 그녀 스스로가 은퇴를 앞당겼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 의아해 했다.

 

“은퇴라는 게 꼭 정년을 채워야만 완성되는 것일까요?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제대로 했고, 정리가 되었는데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죠.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대한병리학회 이사장과 대한췌담도학회 회장까지 임기를 마치자 공식적, 대외적인 역할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지난 30년 간 서울아산병원에서 해왔던 일을 후임에게 잘 전해주는 것이 마지막 목표였고, 모든 리스크에 대비가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병원을 나왔다. 어떤 미련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로서의 삶 외에도 꾸려 나가야 할 삶과 목적들이 너무나 많았다.

 

N잡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잘 들여다보시면 저를 따라다니는 모든 수식어는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작은 번역이었다. 유은실 대표가 처음 서울아산병원 병리과에서 근무했을 당시는 병원이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데이터가 쌓일만한 물리적 시간이나 환자 케이스가 부족해 병리학회에 들고 나갈만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약간의 매너리즘이 찾아올 무렵 간이식을 위한 초단기 연수를 마치고 친구가 공부하고 있던 영국을 방문했는데, 옥스퍼드 대학의 블랙웰 서점에서 운명적인 책 한 권을 마주치게 된다. 일단 재미있었고, 혼자만 읽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경하는 은사께서 마음이 심란할 때는 번역을 하며 정신을 다잡는다고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유은실 대표는 새로운 목표로 마음이 팽창했다. ‘내 이 책을 국내에 번역 출판해보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책을 내는 일에 문외한이었던 그녀는 맨땅의 헤딩부터 시작했다. 작가에게 연락을 했더니 해외번역은 작가 소관이 아닌 출판사를 통해서 진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대 동기의 남편이 운영하는 출판사를 찾아갔다. 그렇게 나온 책이 바로 도서출판 한울의 ‘여의사의 역사’였다.

 

“첫 번째 구슬이 꿰어지자, 신기하게도 두 번째 세 번째 구슬이 운명처럼 엮이기 시작하더군요. 모교에 갔는데 의사학을 하시는 선배가 저를 붙잡고는 미국에서 가져온 자료라며, 번역을 해보면 어떻겠냐며 제본 한 뭉치를 안겨주시는 거예요. 막상 살펴보니 내용이 정말 좋았어요. 그렇게 또 두 번째 번역 출판을 하게 되었죠.”

 

그녀의 번역 경력이 출판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자 의뢰가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책 중 하나가 바로 사이언스 북스의 <우아한 노년>이었다. 그녀의 유튜브 채널 이름이기도 하다.

 

“그때만 해도 이제 번역 일은 그만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때였어요. 병원도 자리를 잡아 한창 바빠지기 시작했고, 또 번역이라는 게 보통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출판사의 간곡한 요청에 우선 책을 보고 결정하겠노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번역에 대한 마음은 식어있던 때였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또 다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 책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아한 노년>은 미국 노트르담 수녀원의 수녀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대규모 학제 간 프로젝트를 정리한 책이다. 연구 대상이 되었던 수녀들은 모두 같은 조건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기에 역학연구를 시도하기에는 최고의 현장이었다. 책의 저자는 100년 이상 수녀원에서 보관해두었던 기록들과 수녀들의 사후 뇌 기증을 통해 알츠하이머와 노화, 장수와 관련된 단서들을 얻을 수 있었다. 유은실 대표는 이 책을 번역하며 건강한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글에 대한 애정을 계기로 2005년 허원미디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인연으로 유은실 대표는 한글과 더불어 ‘죽음’와 ‘노년’을 출판사의 정체성으로 삶기로 결심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만난 책이 한 권 있어요. 안정된 노년을 위한 조건과 전략을 설명하는 내용이죠. 특히 우리의 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이러한 활동이 알츠하이머병의 예방과 풍요로운 노년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뇌과학에 기반해서 안내하고 있어요.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기 시작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었습니다. <은퇴없는 삶을 위한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제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게 되었어요.”

 

번역 하는 동안 유은실 대표는 스스로의 삶의 방향도 함께 정립했다. 

 

“누구나 원한다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시대입니다. 스스로를 하나의 업으로 가둘 필요는 없어요. 공부를 끝내고 직업을 갖기 시작된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시작하세요. 취미를 취미로 한정 짓지 마시고 취미를 본업처럼 하세요. 그럼 바로 그 취미가 나중에 새로운 본업이 됩니다.”

 

의사에서 번역가로, 번역가에서 한글연구가로, 출판사 대표로, 은퇴와 죽음학을 이야기하는 1인 크리에이터이자 교육자로 다양한 삶을 시도했던 그녀가 하는 이야기이기에 더 신뢰가 가는 말이다.

 

우아한 노년의 조건

“우아한 노년을 위한 조건은 다른 게 없습니다. 몸 튼튼, 뇌 튼튼, 마음 튼튼입니다. 2014년 경 몸이 너무 아파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 뒤로 제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운동도 충분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제대로 해야 합니다. 좋은 운동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고요. 그리고 뇌 건강이 중요합니다. 뇌 자체를 이해하고, 뇌의 인지 기능을 최대한 활성화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아 끊임없이 공부해야합니다. 마음 튼튼의 가장 좋은 비법은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많은데, 명상의 다양한 효과는 오늘날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버드 메디컬 스쿨 등 유수의 대학에서 다양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명상을 치료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의사들도 명상을 배우고 있구요.”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열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처음 유은실 대표가 출판사를 차리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만류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고되기만 한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열정 없이는 꾸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얻은 게 더 많았다.

 

“출판업을 통해 굉장히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 일이 아니었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인적 네트워크를 얻었습니다. 공부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제 삶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고요.”

 

평생 공부하는 삶이었지만 배움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본격적인 유튜브 크레에이터로 변모하기 위해 관련 수업까지 들었다. 이때 배운 노하우는 울산의대의 비대면 동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그녀는 울산의대 학생들과 울산대학교 교양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죽음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처음 번역을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분야를 익힐 때마다 그녀에게는 ‘배워서 남 주고픈’ 욕구가 발휘되었다.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타인에 대한 나눔 정신을 잃지 않았던 덕에 그녀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그녀는 8년 전 울산의대에서 죽음학 특강을 마련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교직원들은 물론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학생까지 있었다. 인기에 힘입은 이 특강은 이후 3년 동안선택 과목으로 진행되었고, 2022년부터는 아예 정규수업으로 편성 될 예정이다. 동료의사들과 함께 공저한 <의사들, 죽음을 말하다>에서 그녀는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어떤 계기로 죽음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을까.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저 뿐만 아니라 죽음을 담론으로 삼기를 회피하는 것이 우리들의 보편적인 정서죠.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것이고,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대비의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지금 이 생을 더 가치 있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지요.” 

 

사는 게 바빠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죽음을 잊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죽음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정기적인 모임이 필요합니다. 저 또한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의 홍양희 대표님이 진행하시는 독서모임을 3년 가까이 하고 있는데, 죽음과 관련한 책을 읽고 돌아가면 발제를 하고 있어요. 죽음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볼만한 매체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그림책, 소설책, 수기집, 영화 등. 이런 모임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자기의 경험도 남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죠. 울산의대 대학원에서 죽음학 수업을 진행할 때 자신이 경험한 죽음과 그것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과제를 내준 적이 있어요. 어떤 학생은 레지던트 수련 과정 중 암에 걸린 동료 의사 친구의 주치의가 되어 친구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연구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동료를 발견하기도 했답니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과 관련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누군가와 나누면서 죽음을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 아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유은실 대표가 생각하는 웰다잉(Well-dying)은 무엇일까.

 

“웰다잉이라는 말 자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어요. 죽음의 질이란 사람에 따라, 즉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나뉠 수 있거든요. 확실한 것은 죽음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나간다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을 제대로 산 사람이라면, 죽음 또한 좋은 방식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후에 찾아올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보다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지 못하는데서 오는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낸 이들에게만 허락된 마음가짐일 것이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구어 간다면, 내 죽음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어감과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열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힘이다. 은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이야기하는 유은실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서, 참사람 독자 모두 내면의 새로운 ‘부캐’를 발굴하고 삶의 다양성을 확보해나가기 바란다.